*도서명 : 요산유고

*지은이 : 요산 배진하

*발행처 : 한솜미디어

*쪽   수 : 304쪽 / 본문 흑백 고급 옵셋인쇄

*판   형 : 국판(A5) / 반양장

*정   가 : 16,000원

*출판일 : 20221015

*ISBN   : 978-89-5959-564-8 (03810)

 이 책은?
 
발간사
 
분성군(盆城君) 21세손(世孫)이신 고조할아버지(樂山 裵鎭夏 또는 瑀榮, 1838~1912) 산소에 묘사 지내러 다닌 지 어언 60년이 넘었다. 당시는 하판동(현재 송학리)에서 산동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다시 3km 정도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걸은 후 산에 올라갔다.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는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다니셨고, 지난 100여 년간 수많은 후손이 다닌 길이다.
 
예전엔 추수를 다 끝낸 후 농가가 한가해진 음력 시월 둘째 일요일이 묘사 날이었는데, 때로는 눈보라가 휘날리기도 하는 추운 날씨였다. 산에서 내려다보면 추수를 끝낸 넓은 들판 너머 정겨운 초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묘사를 다 지낸 후에는 줄을 서서 기다리던 근처 동네 아이들 20여 명에게 묘사 떡을 나누어 주었다.
 
집안 어른 한 분이 낭랑한 음성으로 읽으시던 축문(祝文)은 참 듣기 좋았지만 무슨 뜻인지는 잘 알 수 없었다. 모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울 때면, 어른들이 축문의 뜻도 설명해 주시고, 요산 할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도 이야기해 주셨다. 무과(武科)에 급제한 장수이셨지만 학문도 아주 뛰어나서 그야말로 문무(文武)를 겸비한 훌륭한 분이셨다고 들었다. 묘비에 쓰인 글이 바로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했다.
 
어린 시절 말로만 듣던 내용을 몇 년 전 우연히 확인하게 됐다. 장조카가 “집에 이런 고서(古書)가 있다.”며 보여 주었는데, 바로 가친(家親)께서 21세 때인 1935년에 요산 할아버지의 유고(遺稿)를 모아 발간하신 『요산유고(樂山遺稿)』 문집이었다. 모두 한문이라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생전의 고조할아버지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한양길에 조령을 넘어 한강과 남산을 보신 감회를 읊거나 인근의 유학산, 금오산, 팔공산에 올라 지으신 시(詩) 78편, 가까운 사람들에게 쓰신 서한(書翰) 7편, 인간의 도리와 행실에 관한 논설(論說) 5편 등 총 90편의 글이 실려 있었다. 그 외에도 서문 3편과 부록 11편(가문의 내력, 요산 할아버지의 묘지명, 유고 수집과 발간 경위에 관한 글 등)이 수록돼 있었다.
 
지난해 11월 요산 할아버지 묘사 때 종친들에게 이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하니, 좌중이 한목소리로 이 책을 국역해 후손들이 모두 읽을 수 있도록 하자고 했다. 국역자를 찾는 중에 진수(振秀; 盆城君 26世孫)가 지인의 추천으로 한국국학진흥원 고전국역팀 국역위원이신 이기훈 철학박사를 만나 바로 결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요산 할아버지는 용모가 수려하고, 살결이 희고 미목(眉目)이 뚜렷하였으며, 도량이 크고 깊었다고 한다. 또한 시를 짓거나 사(詞)를 논할 때는 유자儒子의 기상을 지녔다고 하며, 칼을 들어 지휘할 때면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재목이라고 하였다. 고금의 일을 말할 때는 호탕하고 의협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실제로 요산 할아버지의 풍모와 운치, 시국 걱정과 나라에 대한 충성, 가족에 대한 따뜻한 사랑 등을 절절히 느끼게 된다. 또한 요산 할아버지의 모습을 직접 뵙는 듯한 벅찬 감동을 금할 수 없으며, 요산 할아버지의 후손임이 너무나 자랑스러워진다.
 
<이하 생략>
본문 중에서 발췌
 
 책속으로... 
 
 
요산 배공 유고의 서문
[樂山裵公遺稿序]
 
 
김홍락(영인본 1쪽)
선비가 진실로 가슴에 품은 포부와 뛰어난 재질이 있으나 속에 깊이 감추어 일생을 마치더라도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기수氣數의 치우침과 시운時運이 가라앉아서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만나는 것은 예부터 어렵다고 했으니, 오직 상象을 살피고 점사占辭를 완상하며 때를 알고 형세를 알 따름이며, 이치가 어지럽더라도 귀에 들어오지 않으며 영욕이 마음에 누가 되지 않는다. 당세에는 모범이 되고 후손에게는 넉넉함을 드리우는 것이니, 어찌 추鄒나라 성인인 맹자께서 말한 “홀로 자신의 몸을 선하게 한다.”라는 것과 방덕공龐德公이 남긴 편안함이 아니겠는가!
요산 배공은 모당공慕堂公의 후손으로,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품이 인자仁慈하고 총명한 자태가 뛰어났으며, 글 짓는 실력을 일찍 이루어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하였다. 부모를 위해 머리를 숙이고 여러 차례 과거를 보았으나 불리하였는데, 마침내 마음을 접고 임천林泉으로 은거하여 오직 몸을 닦고 행실을 삼가 깨달음의 눈을 가지게 되었고, 어버이를 모심에 뜻과 신체의 봉양을 다 받들고, 사람과 사물을 구제함에 자비의 본성을 극진히 하였다.
친구의 두터운 권면으로 다시 머리를 숙여 과거장에 임하였는데, 마침내 힘을 써서 무과에 급제하여 출세하였음에도 일은 근면함으로 시작하였으니, 이에 적은 아교풀로 천 길 황하의 혼탁함을 맑게 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표연하게 고니처럼 날아가 저기 언덕에서 즐거워하니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한가한 날이면 지팡이 닿는 대로 산수를 다니며 사물의 경치를 감상하여 시로 읊어 정신을 펼치고 몸을 가다듬었다. 대개 풍진 세상의 바깥으로 훨쩍 날아 인仁과 지智의 즐거움을 기뻐하였는데, 한번 세상이 바뀜에 풍천風泉에 대한 감흥과 처창悽愴한 뜻이 더욱 간절하여 늘 언사에 드러났으니, 대개 공이 지닌 충의忠義의 마음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성품이 또한 맑고 고아하여 그 마음속에서 발하는 것이 문사文詞에 드러난 것은 충담沖澹하여 넉넉한 멋이 있으며 변변치 못한 선비의 비릿한 기미가 없었다. 그 가운데는 도정절陶靖節(도연명의 시호)이 은거한 것과 등백도鄧伯道가 난리를 피한 과정이 스며 있다. 견해가 정밀하여 깊고 구분하여 분석함이 분명하며, 전대 사람이 밝히지 못한 이치를 훗날을 위해 증거로 삼음이 믿을 만하니, 덕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애석하다고 말한다. 공이 남긴 말과 글은 반드시 이것뿐만은 아닐 것이나 불행히도 흩어져 보존된 것이 겨우 10분의 1 내지 2밖에는 되지 않는데, 고기 한 점만 먹어도 그 솥에 있는 음식의 전체 맛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의 손자 수환秀煥이 공의 글을 판각하고자 하여 교정하는 일을 나에게 위촉하고, 또 한마디 글을 써서 서문을 청하였다. 나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부처의 머리에 오물을 쏟는다는 기롱(실없는 말로 놀림)을 끼칠까 싶어 사양하였으나, 그 부탁이 더욱 간절하여 마침내 마음속에 느낀 것을 대략 써서 돌려보낸다.
 
갑술년(1934) 중추仲秋 하순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전前 행홍문관시강行弘文館侍講 겸兼
지제고知制誥 문소聞韶 김홍락金鴻洛이 삼가 서문을 쓰다.
 
 
최병원(영인본 4쪽)
군자는 사람에 대하여 반드시 먼저 덕행을 논하고 그 다음으로 문예를 논하니, 덕행은 근본이고 문예는 말단이다. 구차하고도 번거롭게 혹 사장詞章과 구두句讀의 학문에만 종사하고 그 근본에 힘을 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족히 군자의 채택을 받을 것인가!
요산 배공은 편안하고도 담박하며 즐겁고 조화스러운 자질에다 겸하여 곧고 바르며 청렴하고 고결한 절조로써 오로지 자신의 학문을 위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여 마음은 바깥으로 치닫지 아니하고, 한결같이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성정수제誠正修齊를 상황에 알맞게 적용하였다. 또 베푸는 것을 좋아하여 흉년에는 농지를 개간하여 친척들을 구휼하고 곤궁한 사람을 보면 물건을 주어 자본으로 삼게 하였으나, 자신은 모자람에도 넉넉하게 스스로 즐겨 화려한 영리의 길은 끊는 뜻이 있었다. 그리고 오직 농사짓고 독서하는 일에 몰두하여 말은 마을의 속언에 이르지 않고, 족적은 향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이후 어버이의 명으로 어쩔 수 없이 과거를 보았으나, 상가(喪家)에 가서 청탁을 해 관직을 취하지 않았다. 이에 “선비가 구차하게 세상에 나아가 높고 낮은 등급에 따라 청현淸顯의 직분에 설 수 없다면, 또한 응당 무인의 대오에서 진을 쳐 활과 말의 전장에 나갈 것이다.”라고 하여 무과에 참가하여 급제하였지만, 이는 공이 평소에 기약한 것이 아니었다. 전랑을 역임한 것은 마음을 다해 성의를 보이고 한 방울 물과 티끌 같은 보답을 하기로 한 것이었으나, 풍조가 바뀌어 대륙(중국)이 침체하자 공의 계획도 어긋났다.
이에 지팡이를 짚고 작은 시詩 주머니를 메고 주유하면서 명승지를 방문하여 다니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혹 고도古都를 지날 때면 마음의 회포를 서술하고, 이름난 누각에 오를 때면 흥취를 풀어 놓았다. 다리 힘이 이미 노쇠하자 이에 돌아와 한 지역에 별업別業을 마련하였으니, 대개 공이 평소 산수벽山水癖이 있어 마침내 늘그막에 은거할 계획이었다. 구름을 갈며 달을 낚을 땐 늙음이 이르는 것을 몰랐고 나이 70이 넘어 장수하고서 생을 마쳤다.
공과 같은 이는 살아서는 천리天理에 따르고 죽어서는 편안한 사람이라 할 수 있으니, 평소에 저술한 시문 약간 편은 모두 평담하고 온화한 것이며 기예를 부려 꾸미는 데 종사하지 않았고, 자연스레 체재體裁가 있었다. 믿을 만하구나, 덕이 있는 자의 말이여. 그가 「이소離騷」를 읽고 느낀 감회의 시와 당나라 때 팔사마八司馬를 애석해 하는 시에서는 더욱 공의 충후忠厚하고도 측은하게 여기는 뜻을 볼 수 있다. 그 음풍농월吟風弄月과 같은 구문은 모두 취미 가운데 흘러나온 것으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르는 새 흉금을 확 트이게 한다.
그런데 그 자손이 각 지역에 산재하여 단란하게 모이지 못하고, 많은 시문을 어린아이들이 서로 가져가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겨우 10분의 1이다. 그러나 고기 한 점을 맛보고도 솥 전체의 음식 맛을 알 수 있으니 어찌 많아야만 하겠는가. 공의 손자 수환이 흩어진 원고 시편 몇 수를 모으고 행장·묘갈墓碣·만사·뇌문誄文 등의 글을 붙여서 한 책으로 편찬하여 판각하여 전하려 하였다. 그리고 나에게 서문을 요청하였는데 얕은 식견을 돌아보니 어찌 이러한 일을 감당하겠는가. 사양할수록 부탁이 더욱 간절하여 다만 그 정을 생각하여 마땅한 사람이 아닌데도 약속하였으니 마치지 못할 듯하였으나, 마침내 대략 마음속에 느낀 것을 서술하여 돌려보낸다.
갑술년(1934) 중추中秋 상순에
완산完山(전주) 최병원崔炳元이 삼가 서문을 쓰다.
 
 
조윤묵(영인본 7쪽)
박옥璞玉은 변화卞和를 만나 팔리게 되었고, 경남梗楠(아름다운 나무 재목)은 장석匠石(도목수)을 만나 쓰이게 되었으니, 보배롭고 중요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연성連城의 재목이 합하여 동량을 이루는 것은 때를 만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달려 있으며, 세상에 아름다움을 품고 무리를 이룬 선비들이 벼슬길에 며칠만 시험받고 마음을 접은 채 산림에서 지내며 애초의 뜻을 지키는 데 나아가고 물러서며 줄어들고 자라남이 운수에 달린 것인가, 아니면 드러나고 가려지며 행하고 행하지 못함을 기미를 살펴서 그러한 것인가! 근고近古에 요산樂山 배공裵公께서 바로 그러한 분이셨다.
공은 모옹慕翁의 훌륭한 손자로 어릴 때부터 품성이 총명하고 비범하였으며 아울러 문사文詞에도 뛰어났다. 집안에 거처할 때는 효도와 우애는 물론 화목을 다하였고, 처세함에는 정성스럽고 성실하였고 충신에 힘을 썼고, 사람들과 교제하고 사물과 접할 때는 가난함을 구휼하는 도리를 다하였으니, 두루 정성스럽고 흡족하게 하여 친척과 마을에서 기뻐함을 모두 얻었다. 곁으로는 활쏘기와 말타기의 기예에 통달하여 서울에서 노닐 때는 무과武科에 1등으로 급제를 하였는데, 비록 평소의 뜻은 아니었으나 군왕을 모시는 데는 충忠을 본받아야 하므로 여기에서 시작하여 마음속에 지닌 보무步武를 펼쳐 탄탄대로의 앞길이 열렸으나 분수 안의 일을 진실로 알았다.
아! 세상이 한번 바뀌고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자 이에 도정절陶靖節(도잠)의 전원부田園賦(「귀전원부」) 한 편을 외우시며 마침내 결연히 멀리 떠나 동강東岡으로 물러나 거하셨는데, 먼저 병암屛巖 한 지역을 선택하고 그 산수의 뛰어난 경치를 사랑하며 인仁과 지智에 낙을 붙이고 저산楮山에 몇 칸의 집을 지으시고서는 학식과 재능을 감추고 모습을 은닉하면서 늙어서 마칠 계획으로 삼으셨다. 샘은 달고 땅은 비옥한 곳을 얻어서 낮이면 농사짓고 저녁이면 책을 읽으며 애오라지 유유자적할 수 있었는데, 저 노을과 구름, 조수鳥獸, 소나무와 대나무, 천석泉石은 어느새 자신의 소유가 되었으니, 다시금 바깥 사물에 어찌 마음을 내겠는가.
마음속의 붉은 충정 시종 사라지지 않아 종묘사직에 대한 염려는 나라를 걱정하는 것뿐만 아니었고, 매번 두공부杜工部(두보)의 “남쪽 별에 기대어 서울을 바라본다”는 구절에 근거하여 서울을 돌아보며 개암나무 감초에 그리움을 의탁하여 눈물을 모르는 새 흘렸다. 이것이 공의 시종인데 만나고 만나지 못하여 그러한 것인가. 지으신 시문詩文 약간 편 모두 평일에 명승지와 이름난 누각, 높은 산에 홀로 올라 노닐며 감상하신 것이고, 아울러 기술하신 것은 혹은 충분과 강개의 뜻에서 나오고 혹은 비어 있고 평화로운 기운이 넘쳐 나온 것이니, 모두 마음속의 것이 바깥으로 발한 글이다.
애석하도다! 높은 산에 노니신 것이 이미 오래인데, 산일散逸(흩어져 없어짐)되는 것을 경계하지 않아 그 가운데 겨우 10분의 1만을 보존하였다. 그러나 곤산崑山의 조각난 옥이나 계림桂林의 한 나뭇가지에서도 영묘하고 신이神異함을 알 수 있으니, 하필이면 글이 많아야 하겠는가. 지금 그 증손 효원孝源 군이 선세의 덕이 사라질까 두려워 이를 판각하여 대대로 오래 전하려 하였고, 당세의 여러 군자가 칭찬하는 사귐이 있었다. 그런데 못난 나[蔑學]를 돌아보건대 어찌 감히 군더더기 말을 덧붙이겠는가. 그러나 이미 선세의 정의를 말하였으니 한마디 말을 하여 문사文辭로 꾸미지 않을 수 없어 대략 느낀 바를 써서 돌려보낸다.
 
알봉엄무閼逢閹茂(갑술년, 1934) 남지월南至月(11월) 하순에
성균관 진사 하산夏山(창녕 조씨) 조윤묵曺允黙이 삼가 서를 짓다.
 
<이하 생략>
- <본문> 중에서 발췌
 
 이 책의 차례
 
 
발간사  4
 
배(裵)씨 관련 자료사진 [득성조, 중시조, 수관조受貫祖, 요산공]   14
요산문중약사(樂山門中略史)  17
 
요산 배공 유고의 서문 [樂山裵公遺稿序]
김홍락(金鴻洛)   (영인본 1쪽) 21
최병원(崔炳元)   (영인본 4쪽) 23
조윤묵(曺允黙)    (영인본 7쪽) 26
 
요산유고 권1
 
시[詩]
한양에서 노닐다 [遊漢陽]    (영인본 23쪽) 30
한강에서 불어난 물을 보다 [漢江觀漲] 2수    31
종남산에 오르다 [登終南山]  (영인본 24쪽) 32
돌아오는 길에 조령에 오르다 [歸路登鳥嶺]    33
둥근 부채를 읊다 [詠團扇]   34
저산에 은거하다 [楮山幽居] 서문을 병기함    (영인본 25쪽) 35
진성로와 함께 보현산을 유람하다 [與陳星老遊普賢山]  (영인본 27쪽) 37
아사雅士 김귀락과 동래를 유람하며 부산 바다를 바라보다 [與金雅龜洛遊東萊望釜山海]   38
돌아가는 길에 영남루에 올라가다 [歸路登嶺南樓] 2수 (영인본 28쪽) 39
무신년(1908) 사월 어느 날 달성에 올라가 조망하다 [戊申四月日登達城眺望] 40
장교준 낙안과 함께 금곡사에 피서하다 [與張樂安 敎駿 避暑于金谷寺]   (영인본 29쪽) 41
고을 수령 황연수가 새 책력을 준 것에 하례하다 [奉賀黃侯 演秀 惠贈新蓂] 2수  42
영산(창녕)의 청암리로 가서 선조의 묘소를 배소하고 척헌재에서 묵다[往靈山靑巖里拜先墓宿陟巘齋] 서문을 병기함  (영인본 30쪽) 43
더운 여름 장낙안과 다시 금곡사에 가다 [暑月與張樂安再到金谷寺] 서문을 병기함    (영인본 31쪽) 45
종형 진붕을 애도하는 만시 [從兄 鎭鵬 挽] 2수    (영인본 32쪽) 47
늦가을에 국화를 감상하다 [晩秋賞菊] (영인본 33쪽) 48
정진태 공을 애도하는 만시 [挽鄭公 鎭泰] 49
고을 원 황연수를 송별하다 [奉別黃侯 演秀] 2수   50
봄날 한적하여 서울을 추억하다 [春日閑寂憶京華]  (영인본 34쪽) 51
시어 권중락을 애도하는 만시 [挽權侍御仲洛]  52
최경식 대경을 애도하는 만시 [挽崔大經 坰植] (영인본 35) 53
상사 권경택에게 시를 부치다 [寄贈權上舍 絅澤]   54
가뭄 끝에 내리는 비 [喜雨]  (영인본 36) 55
병을 앓은 후에 [病後]   56
가을밤에 진성로를 추억하다 [秋夜憶陳星老]   57
병포암에서 유거하다 [屛鋪巖幽居] 서문을 병기함  (영인본 37쪽) 58
환갑날 감회를 서술하다 [甲日述懷] 3수, 서문을 병기함 (영인본 39쪽) 60
비를 걱정하다 [悶雨]    (영인본 42쪽) 63
홍병식 치강과 함께 팔공산에 오르다 [同洪致岡 秉湜 登八公山] (영인본 43쪽) 64
문방사우의 시 [文房四友吟] 서문을 병기함    65
여행하는 도중에 아이들이 마음에 걸리다 [旅中懷兒孫] 2수, 서문을 병기함 (영인본 46쪽) 68
단오 [端午] (영인본 47쪽) 69
박선일·김노언과 화산에 오르다 [與朴善日金魯彦登華山] (영인본 48쪽) 70
인각사 [麟角寺] 71
학소대 [鶴巢臺] 72
단계 하위지 선생의 묘소를 지나며 감회가 있어 [過丹溪河先生墓有感] 2수, 서문을 병기함(영인본 49쪽) 73
좌랑 소산 권용을 애도하는 만시 [挽權佐郞巢山 鎔]    74
중양일에 동지와 함께 아미산에 오르다 [重陽日伴同志登峨嵋山] (영인본 50쪽) 75
제석 [除夕] 76
매화 [梅花] (영인본 51쪽) 77
정월 대보름에 압곡사를 유람하다 [燈夕遊鴨谷寺]  78
「이소경」을 읽고 감회가 있어 [讀離騷經有感] 2수  79
도정절의 「귀거래사」를 읽고 느낌이 있어 [讀陶靖節歸去來辭有感] 2수   (영인본 52쪽) 80
경주에서 옛 자취를 생각하다 [東都懷古]  81
당나라 때의 팔사마 [唐之八司馬] 서문을 병기함   (영인본 53쪽) 82
류종원의 글을 읽다 [讀柳大家]   (영인본 54쪽) 84
병암이란 신령한 곳 [屛巖靈境]   (영인본 55쪽) 85
칠석 [七夕] 86
거울을 보다 [覽鏡]  (영인본 56쪽) 87
옛일을 생각하다 [懷古]  88
김경용 성도를 방문하다 [訪金聖度 炅容]  89
김성문 치백을 애도하는 만시 [挽金致伯 成文] (영인본 57쪽) 90
눈을 읊다 [詠雪]    91
모기 [蚊虻]  92
팔월 초하루 선대의 묘에 성묘하다 [八月初吉省先墓] (영인본 58쪽) 93
돌아오는 길에 당시를 차용하여 넓고 넓은 들판의 풀이라는 시를 짓다 [歸路用唐詩漠漠野田草韻]  94
장형의 환갑 축하 시에 차운하다 [次張兄晬宴韻]    95
추석 [秋夕] (영인본 59쪽) 96
추석 다음 날 [仲秋旣望] 97
양산 [洋傘] 98
매화 대나무 병풍 [梅竹屛]   (영인본 60쪽) 99
등백도 [鄧伯道] 2수, 서문을 병기함  100
시경의「주남」과「소남」을 읽고 [讀詩周召南](영인본 62쪽) 102
「정풍」과 「위풍」을 읽고 [讀鄭衛風]   103
변아(시경「대아」「소아」의 일부)를 읽고 [讀變雅]   104
초승달을 노래하다 [詠初月]  (영인본 63쪽) 105
동락을 유람하다 [遊東洛]    106
추망 [秋忙] 107
유학산 [遊鶴山] (영인본 64쪽) 108
조양각에 올라 삼가 포은 정 선생의 시에 차운하다 [登朝陽閣謹次圃隱鄭先生韻]  109
금오산에 오르다 [登金烏山]  110
농가의 소 키우기 [田家牧牛] (영인본 65쪽) 111
가을날 그윽한 회포 [秋日幽懷]   112
박선일이 방문하다 [朴善日見訪]  113
산골짜기에서 곧장 읊다 [峽中卽事]   (영인본 66쪽) 114
거위를 키우며 시를 남기다 [畜鵝遺贈吟] 서문을 병기함    115
다른 이의 ‘손자를 얻고서’ 시에 차운하다 [次人抱孫韻] 2수 (영인본 68쪽) 117
보릿고개를 한하며 [歉春麥嶺] 서문을 병기함, 무자년(1888) (영인본 69쪽) 118
 
편지[書]
수령 황연수에게 답하다 [答黃候 演秀]    (영인본 70쪽) 120
장교준 낙안에게 주다 [與張樂安 敎駿]    (영인본 71쪽) 121
진사 권경택에게 보내다 [與權進士 絅澤]  (영인본 72쪽) 122
족보 사무소의 여러 종친에게 답하다 [答譜所僉宗] (영인본 73쪽) 123
통정대부 장두각에게 주다 [與張通政 斗珏]    (영인본 74쪽) 125
종제 진헌에게 주다 [與從弟鎭憲] (영인본 75쪽) 126
조카 재연에게 주는 편지 [與姪兒在淵]    (영인본 76쪽) 127
 
서[序]
요산서 [樂山序] (영인본 77쪽) 128
 
기[記]
저전기 [楮田記] (영인본 79쪽) 131
 
논[論]
천인론 [天人論] (영인본 82쪽) 133
유후론 [留侯論] (영인본 84쪽) 136
찬문종후론 [酇文終侯論]  (영인본 87쪽) 139
무후론 [武侯論] (영인본 90쪽) 142
삼강론 [三綱論] (영인본 93쪽) 145
 
요산유고 권2 (부록)
 
가장 [家狀] (영인본 95쪽) 148
행장 [行狀] (영인본 105쪽, 국역문 없음)
묘지명 [墓誌銘]     (영인본 114쪽, 국역문 없음)
묘갈명 [墓碣銘]     (영인본 117쪽, 국역문 없음)
만사 [挽詞] (영인본 121쪽, 국역문 없음)
제문 [祭文] (영인본 124쪽, 국역문 없음)
요산기 [樂山記] (영인본 131쪽, 국역문 없음)
병포암유거기 [屛鋪巖幽居記] (영인본 133쪽, 국역문 없음)
유고고성문 [遺稿告成文] (영인본 135쪽, 국역문 없음)
발 [跋] (영인본 136쪽, 국역문 없음)
발문 [跋文] (영인본 141쪽) 157
 
편집후기    159
 

 지은이 소개

지은이 _ 요산 배진하
 
요산(樂山) 배진하(裵鎭夏)
 
요산 할아버지는 용모가 수려하고
살결이 희고 미목(眉目)이 뚜렷하였으며
도량이 크고 깊었다고 한다.
시를 짓거나 사(詞)를 논할 때는
유자(儒子)의 기상을 지녔다고 하며
고금의 일을 말할 때는 호탕하고
의협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 본 도서는 교보, 영풍문고, 알라딘, 예스24 등 전국 유명서점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back


도서출판 띠앗, 도서출판 한솜미디어

(우:05044) 서울특별시 광진구 아차산로413(구의동 243-22)
대표전화 : 02-454-0492 | 팩스 : 02-454-0493
 
copyright (C) 1997-2022. ddiat, Hansom Inc. All rights reserved. 

관련 도서 보기

젊은 지구를 걷다
셀프힐링인 뉴질랜드
산티아고에서 세상과 소통하다
산티아고, 그 유혹의길
하늘, 땅 그리고 바다
영혼의 안식처 뉴질랜드
백두대간 대장정
백두대간의 사계
마야 잉카 여행
참나를 만나는 길
노을녘 산길 바람소리
150만원으로 가는 여행 캐나다
일본, 일본을 안다
흥미로운 나라 독일
내가 본 세계
라이프 인 어메리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