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 우리 고대 국가 위치를 찾다 <제6권>

*지은이 : 전우성

*발행처 : 한솜미디어

*쪽   수 : 464쪽 / 양장본

*판   형 : A5(국판)

*정   가 : 값 16,000원

*출판일 : 2023325일        <홈으로 가기>

*ISBN   : 978-89-5959-573-0 03900

 

 이 책은?
주류 강단 사학계의 ‘젊은 역사학자 모임’의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 비판 & 반론 & 올바른 비정)
한국 & 중국 정사 기록에 의하여 왜곡과 날조로 뒤엉킨
주류 강단사학의 식민사학을 파헤치다.
 
오랜 기간 이어져 온 논란 사항 정립
고조선 및 삼국의 위치, 연진장성, 패수, 낙랑, 평양 등
고구려, 통일신라, 고려 영역 재정립/고구려 및 고려 천리장성 조작 확인
 
- 광개토대왕의 활동 지역
- 고구려 장수왕 평양성 천도 사실 왜곡
- 온달 장군 활동 지역
- 고구려의 수당 전쟁 위치 조작
- 을지문덕 살수의 위치 왜곡
- 백제 한성의 위치
- 백제 개로왕 한성에 대한 고구려 장수왕 공격 사실 규명
- 백제 천도지 공주와 부여 위치 왜곡
- 백제 멸망 시 당나라 소정방 공격 루트 조작
- 나당 전쟁 위치 왜곡
- 신라인들의 진나라 출신 미반영
- 신라인들의 연나라 경과 이동 및 산동성 건국 사실
- 백제 동쪽 신라 서쪽에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낙랑국
- 왜의 산동성 신라 남쪽 육지 접경 사실
- 통일 신라의 영역 조작
- 후삼국시대 궁예, 왕건, 견훤의 활동지역
- 고려 천리장성 위치 조작
- 고려 영역 왜곡
- 고려 서희 강동 6주 조작
- 쌍성총관부, 동녕부, 철령의 위치 왜곡
 
 이 책의 차례
 
 
전 10권 중 <6권>
 
■유주에 대하여_16
■『신당서』 「가탐도리기」 에 대한 바른 재해석에 대하여_49
■산동성 하슬라 지역에서 활동한 후삼국에 대하여_57
■거란에 대하여_97
■요택에 대하여_104
■발해 5경에 대하여_121
■고려의 영역에 대하여_132
■고려 윤관의 동북 9성에 대하여_160
■고려 서희의 강동 6주(8성)에 대하여(1)_170
■의무려산에 대하여_217
■고죽국에 대하여_229
■노룡현과 창려현에 대하여_263
■백랑수에 대하여_277
■비여현에 대하여_294
■용성과 선비족에 대하여(1)_303
■소위 서희의 강동 6주(8성) 위치에 대하여(2)_333
(1) 흥화진_333
■살수에 대하여_368
(2) 용주와 통주_425
(3) 철주_436
 
·인용 사료 목록_439 / 참고 자료 목록_456
·지도 목록_459 / 도표 목록_462
 
<이하 생략>
 
 
 책속으로...
 
 
[유주에 대하여]
 
이미 어느 정도 설명한 대로 우리 고대 국가 역사 활동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고대 중국 행정구역인 영주, 유주, 청주 그리고 나중의 평주 등은 우리 고대 역사 활동 지역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항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위치 비정을 현재 중국 측 및 이를 그대로 추종하는 주류 강단 사학계의 비정을 왜곡시킴으로써 우리 고대 국가의 활동지역이 왜곡되었기에 이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하다. 재정립을 위해서는 원천적인 것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 필수적이다. 그 다음 이후의 연혁과 경과를 확인하여야 제대로 파악하여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중국의 산서성과 하북성의 유래는 바로
 
 
【사료29】 『요사』 「지리지」
 
<서문>
제(帝) 요(堯)는 천하를 가지런히 하여 9개의 주(州)로 하였다. 순(舜)은 기주(冀)와 청주(青)의 땅이 커서 유주(幽) 병주(并) 영주(營)로 나누어 12주(州)로 하였다. 유주(幽州)는 발해(渤)와 갈석(碣)의 사이에 있고, 병주(并州)는 북쪽으로 대군(代)과 삭방(朔)이 있으며, 영주(營州)는 동쪽으로 요해(遼海)에 미친다.
 
이 사서상에 기록되어 있듯이 처음에는 지금의 태행산맥을 기준으로 서쪽은 산서, 동쪽은 산동으로, 산서는 기주, 산동은 청주로 하였다가 그 영역이 커짐으로써 이를 분할하여 기주는 유주와 병주를 추가로 두어 순차적으로 분할하였고, 청주는 영주를 추가로 두어 추가적으로 분할하였다. 이것이 나중에 원래의 산서인 기주(기주, 병주, 유주)는 산서성으로, 산동인 청주(청주, 영주)는 하북성이 된다. 따라서 원래 유주는 지금의 하북성과 산서성 경계 지역 즉 지금의 하북성 석가장시 서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나중에 이를 나누어 평주를 설치하게 된다. 따라서 유주의 동북쪽 경계가 나중에 나누어 설치한 평주이고, 이 유주의 동쪽 옆인 청주를 나누어 그 북쪽에 설치한 것이 영주이다. 따라서 유주는 하북성 북쪽은 물론 그 동북쪽인 북경 지방이나 요령성 그리고 한반도가 전혀 될 수 없다. 유주의 동북쪽 경계는 불과 석가장시 북부인 평주와 영주일 뿐이다. 그리고 사대에 따라 유주와 영주의 영역과 위치에 변화가 있었지만 평주의 최대 동북쪽 경계는 예전의 위만조선의 영역이자, 나중의 낙랑군 지역이었던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에도 못 미치는 지역이었다. 그리고 영주는 이전의 요동군 지역의 일부인 지금의 하북성 석가장시 동북쪽에 머무르던 지역이었다. 그런데도 이 유주, 평주, 영주와 관계있는 요동군과 낙랑군을 요령성 요하 동쪽과 한반도 평안도 지방에 두어야 하는 식민사학 논리를 유지하고자, 이 유주와 평주를 요령성 요하 동쪽이나 심지어 한반도 평안도 지방까지 비정하는 학자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으니, 이들은 학계에서 추방시켜야 할 대상이다. 이 유주, 평주 사항은 단순한 위치 비정 문제가 아니라 우리 고대사 영역을 축소시키는 소위 민족 반역 행위라고까지 언급할 수 있는 사항이다.
 
 
【사료16】 『진서』 「지리지」 ‘평주’, ‘유주’
 
2. 유주(幽州)
유주(幽州). 안(按), 우공(禹貢)에서 기주(冀州)의 영역이라고 했고 순(舜)은 12목(牧)을 설치하였는데 즉 그중 하나이다. 주례(周禮)에서 말하기를 ‘동북쪽은 유주(幽州)이다’라고 하였다. 춘추원명포(春秋元命包)에서 말하기를 ‘箕星散為幽州, 分為燕國.’이라 하였다. 북방을 태음(太隂)이라고 하는바 (유주를) 유명(幽㝠)이라고 부른다. 무왕(武王)이 은(殷)을 평정하고 소공(召公)을 연(燕)에 봉하였는데 그 후에 6나라는 모두 왕이라 칭하였다. 이내 진(秦)은 연(燕)을 멸하고 어양(漁陽) 상곡(上谷)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을 5개의 군으로 하였다. 한(漢) 고제(髙帝)는 상곡(上谷)을 나누어 탁군(涿郡)을 설치하였다. 무제(武帝)는 13주를 설치하였는데 유주(幽州)는 옛 이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 후에 동쪽 변방을 열어서 현토(玄莵) 낙랑(樂浪) 등의 군을 설치하고 역시 모두 속하였다. 원봉(元鳯) 원년에 연(燕)을 고쳐 광양군(廣陽郡)으로 하였다. 유주(幽州)가 거느리는 것은 대개 9개의 군인데 진(晉)에 이르기까지 바뀌지 아니하였다. 유주(幽州)는 다스리는 군국(郡國)이 7이며 현은 34개이고 가구 수는 59,200이다.
 
 
【사료251】 『진서(晉書)』 卷十四 志 第四 地理上 惠帝卽位, 改扶風國爲秦國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난 후 유주를 나누어 평주를 설치하고 용성을 지켰다.
 
이와 같은 유주와 평주와는 달리 그 동쪽에 있었던 청주는 지금의 산동성 산동반도 인근이 아니라 하북성 동쪽이자, 산동성 서쪽 편으로 유주의 동남 내지는 동북과 마주하고 있어 지금의 하북성 석가장시 동남쪽과 하북성 한단시에 걸쳐 있었다. 이곳을 나누어 석가장시 동북부는 영주를 설치하고 청주는 그 이남을 영역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청주의 북쪽 경계는 지금의 석가장시이자 당시의 압록수였던 호타하이다. 이러한 청주 영역은 이후 당나라 시기를 거쳐 5대 10국(907~960년)을 지나 송나라(960~1279년) 시기 내지는 원나라가 송나라의 남송을 완전히 제압하고 중국 대륙을 통일하기 이전까지는 그대로 지속된 채 지금의 청주 지역으로 비정하는 산동성 산동반도까지는 청주 영역이 확대되지 못한 것이 역사적 진실이다.
즉 송나라 내지는 원나라 시기 이전에는 이곳 산동반도는 청주 내지는 동래 내지는 등주 지역이 아니었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 특히 전국시대의 제나라가 산동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통상적인 상식은 중국 측에 의한 역사 조작이다. 당시 제나라는 산동반도는 물론, 지금의 산동성에도 못 미치는 지역에 머무르던 나라였다. 당시 산동반도를 포함한 그 남쪽의 양자강 유역까지 중국 대륙 동해안 지방 전체는 이전부터 우리 민족 계열인 동이족이 장악하고 있다가 이곳의 남쪽 양자강 유역은 백제가, 그 북쪽은 신라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 증거는 이곳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산동성 지역에서 발견되는 고인돌, 지석묘, 비파형 동검 등이다. 이들 세 가지 유물은 중국 계열 민족들은 전혀 사용하지 않은 중국 한(漢)족인 하화족(夏華族)과 확연히 구분하는 동이족 및 고조선 고유의 지표 유물이다.
이와 같이 상고 시대부터 고대 시기까지도 중국민족 계열은 중국 대륙 동쪽 해안을 전혀 차지하지 못한 관계로, 모든 사서기록상 지금의 바다 즉 해(海) 기록은 지금의 바다가 아니라 그들이 머물던 내륙의 큰 하천이나 호수 그리고 수로를 일컫는다. 그러므로 이 사서기록상의 바다 해(海) 기록을 지금의 바다[海]로 해석하는 것은 왜곡 해석이다. 이러한 왜곡 해석으로 말미암아 우리 고대 역사는 지금의 바다[海]로 둘러싸인 한반도로 왜곡 해석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현재의 왜곡된 개념으로 산동이라고 하는 이곳 산동성 지방은 고조선과 한(韓) 지방, 이후에는 삼한 지방 그리고 그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소위 삼국시대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가 차지하고 있다가 소위 통일신라시대에는 통일신라가 차지한 이후 이 지역에서 궁예, 왕건, 견훤 등 소위 후삼국 세력들까지 활동하였다. 이후 이 지역 일부를 고려가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역사적 진실이다. 따라서 원래의 산동은 지금의 산동성과 산동반도가 아니라 태행산맥 동쪽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중국민족이 이전에 차지하고 있었던 지역은 이곳이고, 그 동쪽인 지금의 산동성 지방은 일정 기간 동안 중국 세력이 진출하지 못하였다. 이것을 입증하는 증거는 고고학적으로는 그동안 많은 세월 동안 자연적이거나 인위적인 훼손 등으로 말미암아 없어졌지만 없어지지 않은 수많은 고인돌이 있고, 문헌학적으로는 바다 해(海) 기록과 중국사서와 우리 사서에 기록된 삼국의 역사적 활동 내역 그리고 당나라 소정방의 백제 침공 기록 이후의 이정기 가문의 평로치청 활동 사항과 장보고의 해상 활동 사항이다. 그 후 중국 측은 원래의 산동과 청주를 지금의 산동성 지역으로 옮겨놓고 원래의 산동과 청주에서 활동한 그들의 활동 내역을 지금의 산동성에서 활동한 것으로 조작한 채 원래 현재 산동성 지역에서의 우리 한민족의 역사를 지우고 역사를 왜곡하여 이전부터 계속, 즉 우공 시절 및 주나라 9주 시기부터 이곳 산동성 산동반도를 포함한 산동성 전체를 중국민족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역사를 왜곡 조작하여 아예 그 명칭 즉 동래, 등주, 내주, 액현 등조차 산동반도로 옮겨놓았다. 그런데도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우리 역사를 중국에 내어주고 있다.
 
산동성 지역은 선사 이래 중국 계열 민족은 진출하지 못하고
우리 민족 계열이 지속적으로 차지하고 있었다.
중국 측은 이러한 사실을 조작하여 선사 이래로 지속적으로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반증하는 증거는 고인돌 유적으로부터
소위 삼국의 역사적 활동 내역과
그 이후 발해 및 소위 통일신라시대의 활동 내역이다.
 
이러한 왜곡 조작에 의한 지명 이동은 지금까지 확인된 것 중에서 대표적으로 요수, 압록수, 태백산, 갈석산, 노룡현, 창려현, 탁록, 탁군, 상곡, 계현, 거용관, 용성, 영주, 중산국, 박작성, 성산, 의무려산, 북진, 금주, 개주, 광녕 등 수없이 확인되고 있다. 현재 설정된 산동성 산동반도의 동래, 등주에 의하여 이곳이 중국민족 계열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부정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발해의 당나라 등주 공격이다. 중국 측은 이 등주 공격을 지금의 산동성 산동반도로 조작하여 놓았는데, 당시 이곳을 공격하였다는 발해 군사를 방어한 것이 당나라 유주 군사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 측은 이 유주를 현재 하북성 북경시로 비정하고 있다. 이 유주를 이곳 북경시로 비정함에 따라 그들이 원래 유주가 위치하였던 이 북경시보다 한참 서남쪽인 하북성 석가장시 인근에서 활동하던 그들의 영역을 이곳 북경시 인근까지 확대시켰다. 설사 유주가 옮겨진 지금의 북경시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등주 비정에 따른 산동성 산동반도를 공격한 발해 군사를 북경 군사로 막게 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결국 유주의 현재 북경 위치와 등주의 산동성 산동반도 위치 설정이 잘못되었음을 입증해 주는 사항이다. 더군다나 이 발해 침략에 대하여 당나라는 신라에 발해의 남쪽 경계를 공격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신라는 한반도가 아니라 이곳 산동성과 하북성 경계지방에 있었고, 발해가 이곳의 북쪽에 있었음을 입증하는 사항도 된다.
그러면 여기서 중국 측 및 이를 그대로 추종하는 주류 강단 사학계의 유주 비정에 대하여 비판하고 바로잡도록 해보자. 먼저 유주 유래에 관한 원천적인 사항이다. 위의 『요사』 「지리지」상의 요 9주, 순 12주 기록은 어느 정도 ‘춘추필법’에 의하여 정리하여 기록한 것이다. 중국사서 기록상 이도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중국의 국가 유래는 ‘요-순-하-상(은)-주’나라 계통으로 이어진다. 물론 요순시대 이전에 ‘삼황오제’가 있다. 그런데 소위 행정구역 설정이 위의 『요사』 「지리지」상의 요 9주에 이어 순 12주가 있었다고도 하지만, 순 12주에 이어 하나라의 시조인 우(공)가 9주를 설치한 것으로 하기도 한다. 즉 순임금 때 기주, 청주, 유주, 병주, 영주, 연주, 서주, 형주, 양주, 예주, 양주, 옹주 등 12주를 설치하였다가 우(공)가 유주, 병주, 영주를 폐지하고 나머지로 9주를 설치하였다가 주나라 시기에 다시 서주, 양주, 여주는 폐지하고 대신 유주, 병주 등을 첨가하였다고 한다. 이를 왜 거론하는가 하면 결론적으로 중국의 고대 시절에 책정한 이 구획은 그들의 신화시대 설화적인 사항과 마찬가지로 허황된 것을 의미함을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함이다.
 
중국사서 기록상의 소위 선사시대인 요순시대에 9주 내지는
12주 설치 자체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는 자체가 역사적 조작이다.
이는 ‘춘추필법’에 의한 과장된 명목상 설정이다.
 
즉 본 필자가 이전 글에서도 거론한 바 있지만, 중국의 고대 역사에 있어서 소위 신화시대인 삼황오제시대는 모두 동이족 역사를 편입하였다. 그리고 이어진 마찬가지의 신화시대인 ‘요-순-하’까지는 소위 말하는 역사시대로 보지 않는다. 상(은)나라 즉 갑골문자와 청동기문화가 있는 이 시기부터 역사시대로 구분한다. 그런데 상(은)나라마저도 원래부터 동이족 국가로 분류하여 왔다. 그리고 주나라 시기부터는 중국 한민족 국가로 분류하여 왔는데 최근에는 주나라도 동이족 국가로 분류하는 움직임이 있다.
그런데 중국 측은 신화시대인 삼황오제시대를 동이족 문화가 아닌 그들의 문화로 완전히 정립시키려는 ‘탐원공정’ 그리고 전설 속의 상(은)나라 및 주나라 이전인 하나라의 경우 명백히 역사시대가 아니고 전설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역사시대로 전환시키려는 ‘단대공정’을 동북공정과 함께 벌여왔다. 이러한 역사 조작 작업을 했음에도 하나라의 경우 B.C. 2070년에 건국된 것으로밖에 하지 못하였다. 그나마 조작 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명백히 ‘홍산문화’ 등 고고학적 증거와 문헌학적 자료에 의하여 전설이 아닌 실제 역사로 분류되는 B.C. 2333년의 고조선보다도 늦다. 사실상의 실질적인 역사인 그것도 동이족 국가로 인정되는 은나라의 경우 B.C. 1600년으로 분류되는데 우리 역사와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 시기 즈음 이전에 그렇게 넓은 영역에 12주 내지는 9주를 설치하여 그 영역으로 하였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실임을 설명하려고 이 사실을 거론함이다. 더군다나 그들이 설치하였다는 12주 내지 9주는 중국 측과 이를 우리 주류 강단 사학계가 그대로 추종하여 왜곡하여 동쪽으로 이동시켰지만 원래의 위치는 산동성과 하북성에서 겹쳐지는 위치이다.
사마천의 『사기』 기록에 의하면 진시황의 정위(廷尉)였던 이사(李斯)가 이르기를 황제·전욱·고신·요·순 등 5제(帝)시대의 영토는 지방 1천 리가량의 작은 영토에 불과했다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후 하나라·상(은)나라·주나라시대에는 ‘천하지중(天下之中)’이라고 하여 전통적인 그들 중국 한(漢)민족의 중심 지역인 황하가 남쪽으로 흐르다가 갑자기 동쪽으로 꺾어져 흐르는 지역으로써, 중국의 초기 수도였던 지금의 하남성 낙양시를 중심으로 한 일정 지역만이 중국 한(漢)민족인 하화족(夏華族) 세력 범위였고, 나머지는 모두 그들이 정한 소위 동이족을 포함한 4개의 오랑캐 영역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지금의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을 모두 그 영역으로 하고 있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그들의 역사 조작인 것이 명백하다.
 
<이하 생략>
 
<이하 생략>
- <본문> 중에서 발췌
 
 지은이 소개
 
지은이 _ 전우성
 
이 책의 저자는 충남 대전 출생으로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감사행정학을 전공하였다. 관세청에서 근무하였으며 퇴직 후 현재는 관세사로 재직하고 있다.
 
저자는 우리나라 역사 특히 고대사에 항상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한편 고대사 왜곡 및 국민의 역사 인식 제고에 한몫을 한다는 일념으로
 
- 1998. 『한국 고대사 다시 쓰여져야 한다』 (을지서적)
- 2015. 『다시 쓴 한국 고대사』 (매경신문)
 
출간 이후에도 왜곡이 바로 잡혀지지 않은 채 국민들의 역사 인식이 오히려 악화됨을 우려하여 고대사에 대한 중국정사와 우리 고대사서를 교차검증 연구한 결과 우리 고대사 전반이 한반도만으로 비정된 채 왜곡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에 따라 각고의 중국 및 우리나라 정사연구에 의하여 밝혀진 고대사의 진실과 이에 따른 올바른 위치 비정이 이루어짐에 따라 이 저서를 저자의 마지막 결실로 내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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