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 우리 고대 국가 위치를 찾다 <제9권>

*지은이 : 전우성

*발행처 : 한솜미디어

*쪽   수 : 464쪽 / 양장본

*판   형 : A5(국판)

*정   가 : 값 16,000원

*출판일 : 20231010일        <홈으로 가기>

*ISBN   : 978-89-5959-580-3 03900

 이 책은?
주류 강단 사학계의 ‘젊은 역사학자 모임’의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 비판 & 반론 & 올바른 비정)
한국 & 중국 정사 기록에 의하여 왜곡과 날조로 뒤엉킨
주류 강단사학의 식민사학을 파헤치다.
 
오랜 기간 이어져 온 논란 사항 정립
고조선 및 삼국의 위치, 연진장성, 패수, 낙랑, 평양 등
고구려, 통일신라, 고려 영역 재정립/고구려 및 고려 천리장성 조작 확인
 
- 광개토대왕의 활동 지역
- 고구려 장수왕 평양성 천도 사실 왜곡
- 온달 장군 활동 지역
- 고구려의 수당 전쟁 위치 조작
- 을지문덕 살수의 위치 왜곡
- 백제 한성의 위치
- 백제 개로왕 한성에 대한 고구려 장수왕 공격 사실 규명
- 백제 천도지 공주와 부여 위치 왜곡
- 백제 멸망 시 당나라 소정방 공격 루트 조작
- 나당 전쟁 위치 왜곡
- 신라인들의 진나라 출신 미반영
- 신라인들의 연나라 경과 이동 및 산동성 건국 사실
- 백제 동쪽 신라 서쪽에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낙랑국
- 왜의 산동성 신라 남쪽 육지 접경 사실
- 통일 신라의 영역 조작
- 후삼국시대 궁예, 왕건, 견훤의 활동지역
- 고려 천리장성 위치 조작
- 고려 영역 왜곡
- 고려 서희 강동 6주 조작
- 쌍성총관부, 동녕부, 철령의 위치 왜곡
 
 이 책의 차례
 
 
전 10권 중 <9권>
 
■국내성에 대하여_16
■환도성에 대하여_33
■평양성에 대하여_51
■부여에 대하여_67
■선비에 대하여(2)(고구려와의 관계)_133
■부여의 약수에 대하여_154
■동부여의 위치에 대하여_162
 
2. 광개토대왕 비문 재해석_193
 
1) 신묘년조 해석_194
2) 전체 비문 재해석_214
■고구려 시조에 대하여_217
■고구려 시조 출처에 대하여_217
■비려에 대하여_233
 
■부산에 대하여_246
■신묘년조에 대하여_255
■치양, 주양에 대하여_265
■양평도에 대하여_324
■관미성에 대하여_329
■백제 한성 함락과 관련한 사실에 의하여 그 위치를 조명하면_356
■광개토대왕 비문상의 아리수와 사서상의 욱리하, 사성에 대하여_383
■광개토대왕 비문상의 아리수에 대하여_390
■하평양(남평양)에 대하여_394
■고구려 하북성 평주 지역 도읍 시기에 대하여_415
■백제의 남한 지방 옮김에 대하여_421
 
·인용 사료 목록_440 / 참고 자료 목록_456
·지도 목록_459 / 도표 목록_462
<이하 생략>
 
 
 책속으로...
 
[국내성에 대하여]
 
【사료499】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37 잡지 제6 지리(地理)四 고구려(高句麗) ‘국내성’
 
주몽(朱蒙)이 흘승골성(紇升骨城)에 도읍을 세움으로부터 40년이 지나 유류왕(孺留王) 22년(3년)에 도읍을 국내성(國內城) (혹은 이르길 위나암성(尉那巖城)이라고도 하고 혹은 불이성(不而城)이라고도 한다.)으로 옮겼다. 《한서(漢書)》를 살펴보건대 낙랑군(樂浪郡)에 속한 현으로 불이(不而)가 있고, 또 총장(總章) 2년(669년)에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이 칙명을 받들어 고구려의 모든 성에 도독부와 주·현을 설치하였는데, 목록(目錄)에서 이르길, “압록(鴨綠) 이북에서 이미 항복한 성이 열하나인데, 그중 하나가 국내성(國內城)이며, 평양(平壤)으로부터 이 성에 이르기까지 17개의 역(驛)이 있었다.”라 하였으니, 곧 이 성 역시 북조(北朝) 경내에 있었으나, 다만 그곳이 어느 곳인지를 알 수 없을 뿐이다.
 
북조 경내 즉 남북조시대의 북쪽 경내인 하북성과 산서성 일대에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 북조에 대하여도 주류 강단 사학계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왜곡된 비정은 앞으로 비판하여 설명하겠다. 국내주 위나암성은 돼지가 졸본성에 도망가서 위나암성에서 찾을 만큼 초기 도읍지와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다.
 
【사료510】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13 고구려본기 제1 유리왕(琉璃王) 21년 3월
 
설지가 천도를 건의하다 (2년 03월(음))
 
21년(2) 봄 3월에 교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자 왕이 장생(掌牲) 설지(薛支)에게 명하여 이를 뒤쫓게 하였다. 〔설지가〕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註 003)에 이르러 찾아내어 국내 사람의 집에 가두어 기르게 하고는 돌아와 왕을 뵙고
 
말하기를, “신이 돼지를 쫓아 국내 위나암에 이르렀는데, 그 산수가 깊고 험하며 땅이 오곡을 키우기에 알맞고, 또 큰 사슴·사슴·물고기·자라가 많이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왕께서 만약 도읍을 옮기시면 백성의 이익이 무궁할 뿐 아니라, 전쟁[兵革]의 걱정도 면할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註 003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 : 고구려에서 지역명으로 나타나는 ‘국내’가 오늘날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 집안평야(集安平野) 일대를 가리킨다고 보는 데 큰 이견은 없다.
 
따라서 초기 도읍지인 졸본성을 제대로 비정하면 이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국내성이 위치한다. 반대로 국내성을 제대로 비정하면 이에서 멀지 않은 졸본성을 제대로 비정할 수 있다. 이 국내성은『당서』상의 고구려 수도 3경인 평양성, 국내성, 한성 중의 하나이다. 국내성의 경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삼국사기』 「지리지」상에나 『삼국유사』, 중국사서에는 위나암성, 불이(내)성 등으로 기록되어 있어 같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삼국사기』 「본기」상과 또 다른『삼국사기』 「지리지」상에는 국내(주)에 있는 위나암성 혹은 불이(내)성으로 국내성과는 구분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국내성이 불이 내지는 불내성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과 연관되어 환도성을 불내성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환도산을 불내성과 연관 지어 기록하고 있다. 또한 고구려가 천도한 곳은 국내(주)이지 국내성이 아니다. 국내(주)와는 다른 국내성은 환도성과 가까운 곳에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국내주는 초기 도읍지인 졸본성과 가까운 곳에 있다. 이곳은 원래 처음의 현토군 자리이자 동옥저 자리이자 예맥의 자리인 지금의 호타하 및 석가장시 동남부이다. 그리고 이와는 다른 채 고구려가 천도는 아니 하였지만 3경 체제의 하나인 국내성은 하북성 호타하 북부에 있었으며 이 인근에 환도성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국내성의 경우 특히『삼국사기』 동천왕 20년(246) 위나라 관구검이 침략하였을 때 관구검이 환도산에 불내성을 새기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고, 이 기록상에『괄지지』를 인용하여 불내성이 곧 국내성이고 환도산과 국내성이 가까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 고국원왕 12년(342) 모용황이 침략하여 환도성을 헐어버리고 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대하여 중국사서『한원』은 환도성을 허물고 갔는데 이가 바로 불내성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국내성과 환도성은 같거나 인접한 곳에 위치한 것으로 비정된다. 이에 따라 주류 강단 사학계는 길림성 집안시의 평지성을 국내성에 비정하고 이웃인 환도산의 산성자성을 환도성 및 위나암성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는 확인 결과 전적으로 일제 강점기 일본인 학자와 해방 후 중국인 학자들에 의하여 주장된 것을 그대로 현재 따른 잘못된 설정이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개설한 “동북아 역ᄉᆞ넷”의 「세키노 다다시의 1913년 조사」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에는 야쓰이 세이이쓰[谷井濟一]와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길림성 집안시의 국내성 및 환도성에 대한 현지 실지조사 결과 환도를 산성자로 문헌학적으로 비정한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의 주장마저 비판한 채 산성자성은 험하여 성내에 왕궁 등을 만들 공간이 없으며 겨우 창고지 정도가 인정된다고 하여 도저히 성내의 지형이 도성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부정하였다.
한편 이러한 결과에 대하여 세키노 타다시[關野 貞]는 집안(통구)성이 국내성이지만 산성자성은 위나암성이라고 주장하였고,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는 환도성이 산성자에 있다는 도리이의 주장에 동조하는 등 일정한 결론을 내놓지 못하였다. 한편 광복 후 중국 학자들은 집안의 성을 유리왕이 천도한 국내성이라 인정하고, 천도 동시에 쌓았다는 위나암성은 본래 산성자산성인데, 산상왕 재위 시에 산성자산성을 석성으로 고쳐 쌓은 다음 이를 환도성이라 불렀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이러한 중국 학자들의 결론이 결국 일제 강점기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현재 주류 강단 사학계의 통설이 되었다. 하지만 일제는 식민사학 논리에 의하여 그리고 중국 학자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춘추필법’의 역사왜곡 논리에 의하여 무리하더라도 즉 역사 논리의 결정요소인 문헌학적이나 그다음 요소인 고고학적 근거에 부족하더라도 자기들 논리에 유리하거나 적합하면 정하는 원칙에 의하여 이곳으로 정하였다.
이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일본의 식민사학 왜곡, 중국의 ‘춘추필법’에 따르는 또 다른 왜곡이자 조작이자 자기 역사를 스스로 훼손하는 행위이다. 위에서 확인한 대로 길림성 집안시의 환도성이나 위나암성으로 비정한 산성자산성은 도저히 한 나라의 도읍성이 들어설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 사실로 드러난 곳이다. 더군다나 이곳 집안시는 고구려의 이 시기인 1세기는 물론 3세기 후반까지의 관련 유물이 나오지 않는다.
 
일제 식민 사학자들이 자기들도 인정한 아무런 근거 없이
국내성, 위나암성, 환도성을 길림성 집안시 인근에 비정하였다.
이후 중국 학자들도 아무런 근거 없이 일제 학자들의 근거 없는
사실을 알면서도 따라 비정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분명히
연구 보고서에 있는데도 주류 강단 사학계가 그대로 따른 것이
현재의 고구려 환도성과 국내성의 집안시 비정이다.
 
그리고 문헌학적으로 이곳은 다른 것은 몰라도 불내(이)에서 알 수 있듯이 한나라 낙랑군 불이현과 관련된 곳으로 기록된 곳이다. 물론 본 필자는 이 불내(이)가 낙랑군이 아니라 고조선의 낙랑 땅인 개마현, 옥저, 예맥, 국내주 지역으로 비정한다.
 
【사료508】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13 고구려본기 제1 유리왕(琉璃王) 22년 10월
 
국내로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쌓다 (3년 10월(음))
 
22년(3) 겨울 10월에 왕이 국내(國內)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이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국내로 천도한다고 하였지 국내성으로 천도한다고 하지 않았듯이 국내주와 국내성은 별개이다. 고구려는 국내성으로 천도한 사실이 없다. 국내주의 위나암성으로 그리고 다음으로 국내성이 가까이 있는 환도성으로 천도하였다. 이것을 『삼국사기』 「본기」외의 「지리지」및『삼국유사』 그리고 중국사서들이 착각하고 있다.
 
고구려는 국내성으로 천도한 사실이 없다. 국내주(국내 지역)
위나암성(혹은 불내(이)성)으로 천도하였다.
다른 천도지인 환도성 가까이에 국내성이 있었던 것뿐이다.
이를 모든 사서들과 이후 혼돈 착각하고 있다.
 
【사료38】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三十七 雜志 第六 지리(地理)四 백제(百濟)
 
압록수 이북의 항복한 11성.
 
국내주(國內州) (한편 불내(不耐)라고도 이르고 혹은 위나암성(尉那嵒城)이라고도 이른다.)
 
물론 이에 대하여도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국내주 지역인 낙랑 땅에 위나암성이 있고 국내성은 환도성과 같이 이보다 북쪽인 안시성 인근 가까이에 비정된다. 이러한 비정은 주류 강단 사학계가 국내성은 별도로 한 채 위나암성과 환도성을 같이 비정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물론 그 위치도 길림성 집안시로 비정하는 주류 강단 사학계는 역사적 왜곡으로써 이곳은 하북성 호타하시 남부의 국내주와 북부의 국내성, 환도성인 안시성이 있다. 이는 국내성과 별도로 환도성이 있음은 물론 가깝게 있다는 것이 앞서 살펴본 중국사서『괄지지』에 기록되어 있다고『삼국사기』가 기록하고 있으며,『삼국사기』상에도
 
【사료511】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18 고구려본기 제6 고국원왕(故國原王) 十二年春二月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쌓다 (342년 02월(음))
 
12년(342) 봄 2월에 환도성을 수리하여 지붕을 새로 이고, 또 국내성을 쌓았다.
 
기록되어 있듯이 국내성은 국내주로 천도한 이후 한참 뒤의 시기인 342년에 쌓은 성이다. 이곳을 쌓은 후 이곳 국내성으로 천도한 사실은 사서기록상 없다. 단지 중국사서『신당서』, 『통전』 상에 고구려의 3경 체제상에 국내성이 들어간다. 그런데『통전』 기록상에는 동진(317~420년) 이후로 평양성에 고구려가 도읍한 다음 모용황이 침공한 이후 국내성으로 옮겼다가 다시 평양성으로 왔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하여『삼국사기』는
 
【사료512】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18 고구려본기 제6 고국원왕(故國原王) 十三年秋七月
 
평양 동황성으로 천도하고 동진에 사신을 보내다 (343년 07월(음))
 
 
가을 7월에 평양 동황성(東黃城)(註 018)으로 옮겨 살았다. 성은 지금의 서경(西京) 동쪽 목멱산(木覓山)(註 019) 중에 있다. 진(晉)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註 020)
 
註 018
이 부분을 ‘(平壤) 동쪽의 黃城’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平壤을 國內 즉 지금의 集安으로 여기고 黃城을 그 동쪽에 있는 지금의 중국 길림성 東台子遺蹟으로 본다. 그러나 평양을 지금의 자강도 강계로 보고 동황성은 그곳에 있는 성명이라 여기는 견해도 있다(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370~373쪽 참조). 또는 이것을 지금의 평양으로 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차용걸, 「고구려 전기의 도성」, 《국사관논총》 48, 1993).
 
註 019
평양의 동남방에 있는 산이다. 《삼국사기》의 편찬자는 平壤 東黃城의 위치를 현재의 평양 근처로 보고 고려시대 당시 西京(平壤)에 木覓山에 있는 城을 언급한 것이다. 그런데 장수왕대에 도읍한 곳은 지금의 평양 대성구역의 大城山 밑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동국여지승람》 권51 平壤府에 “九龍山: 在府北二十里 或云 大城山 或云 魯陽山…木覓山: 在府東四里 有黃城古址 一名 絅山”라는 기록에 의하면 木覓山과 大城山은 별개의 산이었다. 《동국여지승람》도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木覓山城=黃山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黃山을 후에 고구려가 도읍한 곳으로 바로 연결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註 020
《진서(晉書)》 권7 康帝 建元 원년(343) 12월조에 《高句驪遣使朝獻》이라 하였다.
 
모용황의 침공 이후 평양 인근의 동황성으로 천도한 것으로 되어 있어 차이가 있다. 그리고 『신당서』, 『통전』상에 국내성의 서쪽 『신당서』 내지는 남쪽(『통전』)으로 마자수인 압록수가 흐른다고 하였다. 주류 강단 사학계는 이 압록수를 지금의 한반도 압록강으로 비정하고, 이 국내성을 압록강 북부의 집안시 통구성지로 보고 이 기록과 맞추고 있다. 즉 이 통구성지의 서쪽과 남쪽을 압록강이 흐르고 있다.
하지만 비록 『신당서』는 후대의 가필 조작이 확실한 위치 수치를 제외하고는 압록수가 국내성의 서쪽을 흐른다는 것은 주류 강단 사학계의 비정대로 한반도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원래 국내성은 고구려의 여러 도읍 중 북도에 해당하는 것으로 국내주의 위나암성과는 달리 이곳 국내주 북쪽의 압록수인 호타하 북쪽에 비정된다.
따라서 『통전』상의 국내성 남쪽을 흐른다는 기록도 맞게 된다. 그런데 주류 강단 사학계는 이 기록의 모든 사항을 한반도로 비정하듯이 한반도로 비정하여 지금의 압록강 북쪽인 길림성 집안시로 비정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 사서기록과 위치에 얽매여 있다. 하지만 당시 압록수는 지금의 한반도 압록강이 아니고, 국내성은 고구려 수도인 사실이 없다. 그러므로 주류 강단 사학계의 국내성 비정은 잘못인 것으로 당연히 바꾸어야 한다.
 
<이하 생략>
 
- <본문> 중에서 발췌
 
 지은이 소개
 
지은이 _ 전우성
 
이 책의 저자는 충남 대전 출생으로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감사행정학을 전공하였다. 관세청에서 근무하였으며 퇴직 후 현재는 관세사로 재직하고 있다.
 
저자는 우리나라 역사 특히 고대사에 항상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한편 고대사 왜곡 및 국민의 역사 인식 제고에 한몫을 한다는 일념으로
 
- 1998. 『한국 고대사 다시 쓰여져야 한다』 (을지서적)
- 2015. 『다시 쓴 한국 고대사』 (매경신문)
 
출간 이후에도 왜곡이 바로 잡혀지지 않은 채 국민들의 역사 인식이 오히려 악화됨을 우려하여 고대사에 대한 중국정사와 우리 고대사서를 교차검증 연구한 결과 우리 고대사 전반이 한반도만으로 비정된 채 왜곡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에 따라 각고의 중국 및 우리나라 정사연구에 의하여 밝혀진 고대사의 진실과 이에 따른 올바른 위치 비정이 이루어짐에 따라 이 저서를 저자의 마지막 결실로 내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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